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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은 당시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2024년 현재의 감성으로 다시 바라보면 더욱 복잡하고 깊이 있는 의미가 느껴집니다. 특히 요즘 세대가 겪는 불안, 무력감, 인간관계에 대한 거리감, 사회적인 소외감은 영화 속 인물들의 심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 영화는 하룻밤 꿈처럼 흐릿하고 모호한 감정을 자극하며, 명확한 답을 주기보다는 관객 스스로 해석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오늘날 콘텐츠 소비의 특징이기도 하죠. 해석의 여지를 주는 방식은 요즘 세대가 공감하는 방식이자 사고의 흐름입니다. 주인공 종수를 통해 바라보는 세계는 낯설고 생경하며, 이 인물이 겪는 심리적 동요와 무기력함은 취업난, 사회적 고립, 비교의식에 시달리는 현대 청년 세대의 내면을 대변합니다. 영화 속 주요 장치들은 단순한 플롯을 넘어선 상징으로 작용하며 관객의 몰입을 유도합니다. 또한 결말이 주는 허무함과 모호함은, 명확한 답을 찾기보다는 질문 자체에 몰입하게 만드는 요즘 콘텐츠 감성과도 일치합니다. 이처럼 버닝은 시대가 변해도 감정은 반복된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 감각으로 다시 조명될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영화 버닝의 심리
버닝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성 중 하나는 인물의 외적 행동보다 내면의 흐름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주인공 종수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서사는 그의 정서적 상태와 심리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며 진행됩니다. 종수는 작가를 꿈꾸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상황에 처한 청년입니다.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가난한 집안과 감정적 교류가 없는 가족 관계 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이러한 종수의 배경은 그를 무기력하고 소외된 존재로 만들며, 감정 표현이나 대인 관계에서도 뚜렷한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입니다. 영화 초반, 종수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해미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과거 잠깐 알고 지냈던 인물로, 종수의 인생에 갑작스럽게 들어와 새로운 자극을 주지만 동시에 혼란도 불러옵니다. 해미는 종수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합니다. 그녀의 감정 표현은 자유롭고 즉흥적이지만, 종수는 이에 대한 반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수동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이는 그의 내면이 외부 자극에 쉽게 휘둘리고, 자아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 주변에 휩쓸리는 성향을 보여줍니다. 이후 등장하는 벤이라는 인물은 종수에게 더 큰 심리적 충격을 줍니다. 벤은 명확한 직업이나 배경 설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여유로운 인물로 보입니다. 그는 고급 아파트에 살고, 외제차를 몰고 다니며, 세련된 외모와 여유로운 말투를 지녔습니다. 반면 종수는 그의 삶과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으며, 벤을 통해 비교의식과 열등감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이때부터 종수의 내면에서는 복잡한 감정이 교차합니다. 해미에 대한 감정과 벤에 대한 질투,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도 모르는 혼란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벤과의 만남 이후 종수는 점점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로 빠져들게 됩니다. 해미가 갑작스럽게 사라지면서, 종수는 의심과 분노, 불안감에 사로잡히고, 이를 벤에게 투사하게 됩니다. 하지만 종수는 벤을 직접적으로 비난하거나 추궁하지 못하고, 대신 그를 몰래 따라다니며 관찰합니다. 이런 행동은 그의 심리 상태가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종수는 벤이 해미를 죽였다고 확신하지만, 실제로는 명확한 증거나 정황이 부족합니다. 이처럼 관객은 종수의 시선을 통해 사건을 바라보지만, 그가 보는 것이 진실인지 혹은 심리적 착란에 불과한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심리적 모호함은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중요한 정서로 작용합니다. 종수는 영화 내내 주변 세계를 수동적으로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자신을 중심에 놓지 못하고, 타인의 삶을 부러워하거나 의심하며, 끝내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감정의 흐름 속에서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청년 세대의 감정 구조와 유사한 점을 보여줍니다. 취업난과 경제적 불안, 인간관계의 거리감, 자아에 대한 혼란은 종수의 심리와 맞물려 관객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현대 사회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종수는 마치 거울 같은 존재로 다가옵니다. 그는 ‘왜 사는가’가 아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조차 답을 내리지 못하는 불안정한 상태 속에서 움직이며, 관객은 그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상징
버닝은 줄거리를 따라가기보다는 장면과 사물, 인물의 대사를 통해 관객에게 상징을 던지는 영화입니다. 이 상징들은 관객의 해석을 필요로 하며, 그 모호함이 오히려 영화의 매력으로 작용합니다. 대표적으로 벤이 언급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는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자신이 느끼는 지루함과 공허함을 해소하기 위한 일종의 폭력적 충동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특히 벤이 말하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비닐하우스’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 혹은 존재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사람들일 수 있으며, 이는 해미의 실종과도 연결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상징은 고양이입니다. 종수는 해미의 고양이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실제로 고양이를 눈으로 직접 확인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고양이는 실제로 존재하는 듯한 흔적을 남기기 시작하고, 관객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고양이는 해미의 존재 자체, 혹은 종수의 감정 상태를 상징하는 존재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존재 유무를 확인하려는 종수의 집착은, 감정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장치가 됩니다. 해미가 하는 아프리카 춤도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그녀는 ‘우주의 허무함을 느끼는 춤’이라고 말하며 공연을 하지만, 그 장면은 마치 현대인의 정체성 혼란, 감정의 분출, 존재 이유에 대한 고민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듯합니다. 영화 내내 반복되는 사운드, 공간의 배치, 카메라의 움직임 역시 상징적 해석을 자극합니다. 예를 들어 종수의 농가는 탁 트인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고립된 느낌을 주며, 서울의 도심은 복잡하지만 인물 간의 거리감이 오히려 더 큽니다. 이러한 설정은 영화 전반에 깔린 무기력과 상실의 감정을 더욱 부각하는 장치로 작용합니다. 모든 장면이 의도를 가지고 설계된 듯한 이 영화는, 상징을 통해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을 건드리고,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복선
버닝의 서사는 복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단순한 전개로 보이지만, 반복해서 보면 보이지 않던 장치들이 드러나면서 전혀 다른 인상을 줍니다. 초반 해미가 말한 우물 에피소드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해미는 어릴 적 우물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고 하지만, 종수는 그런 일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후 종수가 그녀의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을 때도, 아무도 그런 사건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 작은 일화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테마, 즉 ‘기억과 존재의 불확실성’을 암시합니다. 해미의 존재 자체가 어느 순간부터 흐려지고, 그녀가 실제로 사라졌는지, 종수의 오해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게 됩니다. 벤 역시 처음부터 불분명한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의 정체나 직업, 과거에 대한 정보는 거의 주어지지 않으며, 그의 말속에는 작은 힌트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해미와의 관계를 애매하게 표현하며, 종수에게 ‘태우는’ 행위에 대해 흥미로운 듯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해미는 연락이 끊기고, 종수는 벤을 의심하지만 그 역시 증거나 근거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화 곳곳에는 해미의 흔적과 그녀가 사라졌다는 징후가 꾸준히 등장합니다. 벤의 집에 있는 여성용 물건들, 고양이의 발톱 상처, 벤이 장례식처럼 행동하는 순간들 등은 하나하나가 복선이며 관객이 단서를 조합하도록 유도합니다. 영화 후반 종수가 벤을 미행하고 관찰하는 장면들도, 이야기의 진실보다는 그의 심리 변화를 더 뚜렷하게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종수는 점점 현실 감각을 잃고, 자신의 의심이 진실이라고 믿기 시작합니다. 이 믿음은 결국 그의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지며, 마지막 장면에서 자동차 안의 불꽃은 그가 느낀 절망과 분노, 혹은 해방감마저 상징하는 듯 보입니다. 이 모든 복선은 단지 이야기 전개를 위한 요소가 아니라, 감정과 생각을 곱씹게 만드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복선들이 곧 관객의 해석 여지를 확장시키며, 이야기 외적인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오늘날의 관객들은 이러한 다층적 구조를 오히려 더 선호합니다. 단순한 서사보다는 자신이 해석할 여지가 많은 이야기에서 더 큰 감정적 충족을 얻기 때문입니다. 영화 버닝은 단순한 미스터리를 넘어선, 감정과 존재에 대한 복합적 탐색입니다. 종수의 심리, 영화 전반에 깔린 상징, 치밀하게 설계된 복선들은 요즘 세대의 감성과 맞닿아 있으며, 보는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다른 해석이 가능한 작품입니다. 이는 단순한 소비를 넘어, 감정적 몰입과 해석의 쾌감을 추구하는 현대 관객들에게 매우 적합한 영화입니다. 다시 보게 되는 영화, 버닝. 지금 이 시점에서 꼭 다시 감상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